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자겸의 난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||<#fedc89> '''{{{#670000 왕당파}}}''' ||<#000> '''{{{#fff 이자겸파}}}''' ||<#fff> '''{{{#000 척준경파}}}''' || || 김찬 || [[이지미]][* 이자겸의 장남.] || 척순[* 척준경의 아들.] || || 안보린 || 이공의[* 이자겸의 차남, 척준경의 친구 [[왕자지]]의 사위.] || [[척준신]][* 척준경의 동생.] || || [[지녹연]] || [[의장(고려)|의장]][* 이자겸의 7남, 출가한 승려, 현화사의 주지. 현화사는 현종이 세운 영향력이 매우 큰 절이다.] || [[왕의(고려)|왕의]][* 척준경의 친구 [[왕자지]]의 아들이며 이자겸의 아들 이공의의 외삼촌.] || || 고석 || 이지원[* 이자겸의 6남, 척준경의 사위.] || 전기상 || || 권수 || [[이지보]][* 이자겸의 4남, 김향의 사위.] || 최영 || || [[오탁]] || 이지언[* 이자겸의 3남.] || 김정분 || || [[최탁]] || 학문 || || || 이수 || 지호 || || ||<-3><#000> '''{{{#fff 이자겸의 난의 시발점}}}''' || || [[최사전]][* 궁궐 전소 후 왕당파로 행동.] || [[이공수]] || 홍입공[* 궁궐 전소 후 왕당파로 전향.] || 인종 초기의 고려 왕조는 [[목종(고려)|목종]], [[천추태후]] - [[김치양]], [[강조(고려)|강조]] 3파전 이후로 가장 혼란스러운 [[정치]] 국면을 보였는데 이 국면 속 먼저 손을 쓴 세력은 다름아닌 왕당파였다. [[문경태후|인종의 어머니]]는 [[이자겸]]의 둘째 딸, [[인종(고려)|인종]]의 두 왕후는 이자겸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이었다. [[외척]] 중의 외척이 된 이자겸은 조선국공(朝鮮國公)으로 봉해졌고 그의 관저는 의친궁(懿親宮) 숭덕부(崇德府)[* 인종은 부를 설치해줄 때 엿을 넣어 선물했는데 부의 이름을 숭덕(崇德)(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궁 이름)에서 따왔다! 하도 오래된 일이라 아무도 이걸 몰랐고 나중에야 숭덕부가 누구의 관저였는지 알려진다.]로 봉해졌으며 그의 자택은 중흥택(重興宅)[* 원래 이름은 개명택(開明宅)인데 이자겸의 선대인 [[이자연(고려)|이자연]] 세대가 살던 곳이었다. <고려사>에는 인종이 개수하고 이름을 바꿔 주었다는데 누가 압력을 넣었는지는 자명하다.]으로 봉해져 그의 지위를 크게 올렸다. 그는 독자적으로 [[송나라]]와 교류했으며 자신을 지군국사(知軍國事)[* 군대와 국가를 (국왕 대신) 돌보는 사람.]라 칭했다.[* 당시 시대에 군주의 허락없이 독자적으로 타국과 교류한건 자신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. [[후삼국 시대]]의 [[왕봉규]], [[견훤]]의 외교 활동이 부각되는 것이 그 이유다.]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당대 소문난 무인(武人)이자 무신(武臣)이었던 [[척준경]]을 끌어들였다. 이자겸은 아들 [[이지원]]을 척준경의 딸에게 장가를 보내고 이공의를 척준경의 절친 [[왕자지]]의 딸에게 장가를 보내 인척 관계를 맺으면서 [[동맹]]을 강화했다. 임금에 대해 충심이 없던 척준경 또한 [[권신]] 이자겸의 호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. 이렇게 군부와 정권을 모두 잡은 이자겸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결국 국왕 인종을 분노케 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